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결혼의 대충 조건

20대 후반의 딸이 있다 보니

결혼을 생각하는 미혼남녀의 설문을 

읽게 되었어요.

그중에서 얼굴 조건은

"키스할 정도 이상"되어야 한다는 

항목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키스할 정도 이상"의 얼굴이 

도대체 어느 정도 기준일까요?

사랑의 불시착으로 핫하다는

그 커플,

오래전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보았던

리처드 아재와

줄리아 줌마처럼

그런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상당히 매력 있는 그 정도의 외모가

기준이라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선

그리 쉽게 찾기는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결혼의 대충 조건을 함께 나눠보자니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젊은 친구들이 진짜 싫어한다는

금기 용어 "라테 말이야" 

한번 써볼게요.

 

직장 상사분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1년 넘게 그저 평범하게 교제하던 중 남편이

결혼 비스무리한 허락 인사차

친정부모님을 처음

찾아뵙게 되었답니다.

남편에겐 시험 보는 것 같이 떨리고 긴장되는

첫 만남이었겠지요.

평소에 입던 캐주얼 복장 대신

그날은 모처럼

양복도 깨끗이 입고 불편하지만

넥타이도 매고,

부모님을 위해 

가벼운 과일 선물도 들고 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1 시간 넘게 어색한 분위기로 이야기했지만,

그런대로 차도 마시며

무난하게 인사를 잘 마쳤답니다.

 

둘째 딸인 저를 누구보다도 더 걱정해주시고

저의 생각과 판단을 응원해주셨던

아버지는 남편의 인상이

수수하고 착실해 보여 좋다 하셨지요.

 

그런데 저와 둘이 앉은 친정엄마의 표정이

싹 바뀌시는 거예요.

평안도 출신인 친정엄마의 성격은 그야말로

카리스마 넘치고

그래서 화도 엄청 넘치고

예스 노우가 정확한 

한마디로 불같은 좋지 않은

기질이셨지요.

 

그 엄마의 기본 성향을 닮은 

저도 만만치는 않은 성격이라

까다로웠고요.

둘 다 쉽지 않은 성격이어서

엄마는 사회생활이나 생활습관,

결혼문제까지도

가능한 저의 고집을 건드리지 않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엄마가

한마디를 심각하게 꺼내시는 거예요.

 

"야, 당장 그 점을 빼라고 해,

결혼 전에 반드시 반드시

그 점을 빼지 않으면,

다신 나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

엄마의 불호령에 저도 1주일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점 빼기를 꺼냈답니다.

말로는 권유였지만

사실은 엄마의 명령이나 다름없었지요.

 

평소 소심하고 조용하고 말없던 남편은

일단은 집에 가서 생각해보겠노라, 

이단은 결정해서 알려주겠다 했어요.

1주일 후 다시 만난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가족과 상의하고 내린 결정이라며

그 점을 빼겠다고 하네요.

30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그 점은 남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어쨌든 당시만 해도 386세대인

저희 세대는

의료적인 목적이 아니면

가급적 얼굴에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보수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거든요.

 

남편은 결심을 하고도 병원과

날짜를 못 정하고

망설이며 선뜻 실행을 못하고 있었어요.

결국 다시 1주일이 지나고 토요일 오후로

제가 디 데이를 잡았답니다.

 

혼자 병원에 보내기가 걱정되어

직장 일을 마치고 과천의

작은 개인 병원으로 함께 갔어요.

당시 그 병원은 피부비뇨기과로 

유난히 남자 환자가 많았는데,

대기석에 앉아 저 혼자 기다리는 시간이

왜 그리도 길고 어색한지요.

 

한참만에 나온 남편의 표정은

여러 감정이 교차된 듯 보였어요.

그런데 남편 얼굴 표정 보다도

냄새라면 개코를 능가하는

저의 후각은

레이저로 점 태운 그 매캐한

냄새까지도 느꼈답니다.

 

당시는 점 갯수당 돈을 내었는데,

카운터에서 담당자분이 웃으시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점은 너무 커서 빼도 빼도

힘들었다 하셨어요.

이제까지 뺀 점 중에서

아주 큰 점이라고 하면서,

한 개지만 세 개 이상의 값을

내어야 한다

하시길래, 제가 좀 깎아서(?)

두배로만 돈을 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 허락을 받으려던 딸의 위치에서

이제는 제가 어느새 엄마의 자리에

앉아있네요.

성인이 된 자녀에게 기대하는

결혼의 대충 조건은 뭘까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선천적인 장점이든 단점이든

후천적인 선택이든 취향이든

예를 들어 미용적인 목적으로든

자리관리의 연장으로 성형수술을 했든 

그 어떤 모습과 변화라도

너그럽게 받아줄 수도 있는

편견 없는 그릇을 갖고 있는

부모인지 뒤돌아보게 됩니다.

  

이제 곧 결혼생활 30년.

이제는 이혼하기 좋을 때라는

우스운 농담도 합니다.

이제는 맨 정신으론 도저히

뽀뽀도 어렵다는

인생의 후반전을 지나가고 있는

힘든 나이가 되었어요.

어제 먹었던 밥풀떼기가

남편 얼굴 한복판에 붙어있든 말든

I don't care whatever you have...

많은 것을 말없이 내려놓는

경지에 이르렀답니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한 번씩은

30년 전 친정엄마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돼요.

아직 애정이 있다는 말일까요?

근데 요즘 남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Omg.. 갑자기 반만 남은

눈썹이 아쉽네요.

그래서 아마존에서 눈썹 키트를 샀답니다.

약 4주간 지속된다는 

long lasting 문구가 맘에 들어요.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할 때

한 번씩은 대충 내려놓고

그래야

사는 것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자유해질 것 같네요.

오늘 밤 영감탱이 잠든 얼굴에

대충

눈썹을 싹싹 그려놔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