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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결혼식

"그만 자고 빨리 안 일어나?

결혼하러 안 갈 거야?"

 

 

 

결혼꽃1 taken by 할미꽃소녀

 

 

 

 

"벌써 9시가 넘었는데

결혼식 늦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도대체 너는 

결혼하러 가는 날까지 내속을 썪이니?

내가 아주 아침마다

너 깨우는 것 때문에 늙는다 늙어?"

 

 

 

"나 안 깨워도

엄마 이미 늙었거든요.

엄마는 결혼하는 날까지도 나를

왜 이렇게 귀찮게 해...

11시에 알람맞쳐놨단 말에요".

 

 

 

엄마의 계속된 고성능 하이톤 때문에

간신히 잠은 깨었지만,

전날 여행가방을 싸느라 낑낑대었던

피곤함이 채 가시질 않아

그대로 이불속에 한참을

누워있었는데요.

"이렇게 피곤할 줄 알았으면

결혼식을 아예 한 5시쯤으로 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10시가 넘어서도

거실로 나오지 않는 저 때문에

이러다간

한바탕 집이 또 2차 대전이 시작될 듯

불안한 마음이 드셨던지

아버지가 제 방문을 열고

한 말씀 나직이 하시네요.

 

 

"엄마가 벌써 아침밥 채려 놨다,

오늘까지만 네 엄마 말 좀 들어라"

 

 

 

 

결혼꽃2 taken by 할미꽃소녀

 

 

 

아침 같은 점심을 먹고 얼굴에 로션만 바른 채

가벼운 티셔츠 하나 걸친 채로

집을 나섰어요.

어차피 예식장 미용실에서 메이크업도 하고

머리손질도 할 것이니까요.

 

 

결혼식 비포와 애프터가 달라도 너무 다르죠.

화장으로 드레스로 꽃으로

잠시나마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신이 가능하답니다.

호박이 진짜 감쪽같이 수박 될 수 있어요.

 

 

계속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택시를 탔어요.

행선지를 기사분께 얘기하니

월요일 오후 후줄근하게 혼자서 예식장을

가는 것이 궁금하였던지

거울로 슬쩍 보시면서 물으시길래

제가 대답했지요.

 

 

" 지금, 결혼하러 갑니다".

 

 

 

 

결혼꽃3 taken by 할미꽃소녀

 

 

 

지금부터 딱 30년 전

1991년 6월 17일에 결혼을 했어요.

월요일 늦은 오후 3시예요.

 

 

당시만 해도 평일 결혼식이 드물었던 때였어요.

유행처럼 결혼 전 야외 드레스 촬영과

결혼 후 해외 신혼여행은

붐이었던 때였고요.

 

 

월요일 오후로 예식날짜를 선택하고

(일주일 중 제일 조용하여 반값 할인해준다기에)

 

야외 촬영은 패스

(사진앨범 만들어도 나중에 안 볼 것 같아)

 

시차로 해외여행도 패스

(신혼여행 가서 그동안 밀린 잠이나 실컷 자고 싶어)

 

예식장 대여 드레스 눈으로 딱 보고 10분 만에 선택

(신촌 아현동이며 강남이며 드레스 고르러

다니는 것도 번잡해서)

 

 

암튼 귀찮은 것은 올 패스,

그래도 결혼식은 생략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에요.

😅😅😅

 

 

 

 

17일 저녁1 taken by 할미꽃소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남편과 둘이서 살 아파트 냉장고엔

친정엄마가 갖다 놓은

된장국과 김치가 있더라고요.

 

 

여행 가방을 풀어 세탁기에 빨래를 휙 돌리고

쌀을 벅벅 씻어 전기밥솥 코드를 꼽고 나니

그제야 잠시 꺼졌던

제정신이 온 상태로 돌아오더라고요.

 

 

신혼의 단꿈이 3년은

아니 최소 3개월은 간다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답니까?

신혼여행 다녀온 순간부터

결혼의 환상이

바로 깨지더라고요.

 

 

엄마의 잔소리 세계는 벗어났으나

그날부터 저에겐 밥의 현실이 밀려왔어요.

 

 

결혼생활은 카페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면서

달짝지근한 케익만 즐기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와인잔 앞에 놓고 꽃꿈만 꾸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나와는 삶의 방식이 다른 남편과

남편으로 인해 가족이 된 낯선 시댁 식구들과

서로 맞춰 살아가면서

식탁 위엔 꽃 대신 밥을 올려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자식의 똥기저귀를 갈으면서

식은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연애할 때 가끔씩 맡았던 향기로운 향기 대신

감추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발냄새, 입냄새, 방귀 냄새를

매일 킁킁 맡아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분은

이슬을 먹어야 한다 하더라고요.

결혼생활의 고단함을 잠시라도 잊으려면

참이슬을 마셔야 된다고요.😂

 

 

 

 

17일 저녁2 taken by 할미꽃소녀

 

 

 

부모님 그늘 밑에서 밥 얻어먹으며

대충 빌붙어 얹혀살던 제가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

자주독립하여 가족을 위해 밥을 지어야 하고

제 밥그릇은 물론

가족의 밥그릇까지 깨끗이 치워야 하는

책임의 삶이더라고요.

 

 

결혼식은 쿨하게 대충 했어도

결혼생활은 대충 해서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매일 조금씩 알게 되었지요.

 

 

한 살의 나이차로

만난 우리 부부는

 

험난한 시간을 거치면서

상냥하고 다정했던 토끼는

어느새 싸납고 거칠고 화 많은 

토끼 같은 호랑이가 되었고

 

점잖고 말수 적은 남편은

어느새 앞뒤 고집불통으로 꽉 막힌

호랑이 같은 토끼가 되어버렸답니다.

 

 

30년 지기 베프가 되었다면

정겨운 오누이가 되었다면

서로의 취향과 마음도

개떡이든 찰떡이든

이제는 알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싸움은 진행형입니다.

 

 

 

17일 저녁3 taken by 할미꽃소녀

 

 

 

오죽하면 결혼 30주년을 기념한다고

호박떡도 맞추고,

코로나 때문에 지난 1년간 서로

힘들었을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집 가까이 사는 분들에 드리고 싶어

플라스틱 컨테이너를 사러 갔었는데요,

 

 

컨테이너 크기 때문에 의견이 달라

사람 많은 그 복잡한 마켓에서

또 언성을 높였어요.

30주년 기념이 아니라

30년간 쌓인 서로에 대한

불만이 터진 거죠.

 

 

"어휴, 내가 당신 같은 사이코랑 괜히 결혼했어"

"미 투,

나도 당신 같은 꼰대랑 이제껏 괜히 살았어".

 

 

호박떡을 찾고 컨테이너를 사고

화를 삭이고 나니,

결혼 50주년 기념쯤도 함께 할 수 있을까...

100세 초고령 시대라지만,

차 안에서 남편이 물은

그 단순한 질문 속에

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결국

내가 더 잘났네,

당신이 더 더 문제다

얼굴 붉히며 거친 말로 싸워봤자

 

 

뒤돌아보면

결국

49대 51

51대 49

 

고작 2점

앞서고 뒤진 것이더라고요.

 

 

 

 

17일 저녁4 taken by 할미꽃소녀

 

 

 

물론 살아가는 과정 중엔

단 1점이 중요한 순간도 있지요. 

중요한 시험과 스포츠 경기에서는요.

 

 

하지만 결혼생활은

1점 커트라인 때문에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는

시험이 아니더라고요.

 

 

배우자를 떨어뜨려야만

내가 우승을 거머쥐는 오디션도 아니고요.

 

금은동 메달을 따기 위해

미치도록 달려야 하는 경쟁의

스포츠가 아니더라고요.

 

그저 마음을 중심을 제대로 지키며

서로에게 화음과 추임새를 넣어주고

둘이서 끝까지 완주를 한다면

좋을 장거리 여행이더라고요.

 

 

 

 

17일 저녁5 taken by 할미꽃소녀

 

 

 

 

결혼의 시작은 사랑이었지만

결혼의 과정은 무한리필 배려와 헌신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은

 

나의 한계를 넘어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방법대로

상대방을 대접해주는 것,

 

배우자를 주인공으로 뫼셔주고

내가 기꺼이 엑스트라로 남는다면

 

 

비극의 무대가

희극의 공연으로

잘 마칠 수 있음을

꿈꿔봅니다.

 

 

 

 

17일 저녁6 taken by 할미꽃소녀

 

 

 

30년,

싸운 날이 더 많았지만

서로 잘 버텼다...

격려하며

탄수화물 저녁은 생략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망고맛 무스 케익도 한쪽씩 나누고

 

 

제가 좋아하는 베린저 진판델 와이트 와인도

한 잔씩 마셨는데

🐇🐅

 

 

 

그새 알코올이 올라오나 봐요.

잊을 수 없는 2021년 6월 17일 목요일의

대화는

이렇게

동문서답으로 마감합니다.

 

 

"근데 내일 며칠이지?"

 

 

"화요일 아녜요?"

🙄🙄🙄